한나라 역사 영화-'초한지-영웅의 부활' -전쟁 영화,한나라 건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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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영화

한나라 역사 영화-'초한지-영웅의 부활' -전쟁 영화,한나라 건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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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역사책 중 하나이다. 그 이유는 초한지에 사람의 성향을 배울 수 있고, 성공과 실패, 충성과 배신, 정치와 문화, 뛰어난 지략과 철두철미한 군사 전략, 사람을 매수하는 모략과 타락. 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후기 설명에 앞서, 필자가 좋아하는 초한지 일화

● 어찌하여, 일자무식의 유방이 귀족출신의 항우를 제압할 수 있었을까?

전쟁이 끝나고 낙양에 주연을 베푸는 자리에서, 유방 자신이 항우를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신하들에게 물었다. 

신하들의 답변을 듣고는 시원찮았는지, 당당히 이렇게 얘기했다.

 

"군막 속에서 계책을 짜내 천 리 밖에서 승리를 결판내는 것은 장량만 못하오. 
 나라를 어루만지고 백성들을 위로하며 양식을 공급하고 운송 도로를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만 못하오.
 백만 대군을 통솔해 싸우면 어김없이 이기고 공격하면 어김없이 빼앗는 것은 내가 한신만 못하오.
 이 세 사람은 모두 빼어난 인재이지만, 내가 그들을 임용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이오.
 항우는 범증 한 사람만 있었으면서도 그를 중용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가 나에게 사로잡힌 까닭이오."

 

이렇게 유방은 사람들로 싸움을 했고, 항상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고, 개방적이고 유연한 태도로 사람을 대했다.

반면, 항우에게도 좋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항우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일자무식의 유방이 귀족출신의 항우를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초한지-영웅의 부활

 

 

한고조 유방의 이야기가 아닌, 항우와 한신의 이야기이다.

항우는 유방의 숙적이었고, 한신은 한나라를 건국하는데 일조한 개국공신이자 유방 휘하의 대장군이었다.

 

 

 

소하 - 개국공신으로서의 면모를 보이다.

 

유방이 항우보다 함양에 먼저 입성하자, 진나라의 마지막 왕(자영), 유방 앞에 무릎 꿇다.

 

 

함양 입성 직후, 소하는 입성하자 마자 시골 한량 출신이었던 유방은 궁 내의 여자와 금은보화에 눈이 멀어 오래 머물며 즐기고 싶었지만, 번쾌나 장량의 충고에 패상으로 물러나 일절 손 대지 않았다. 이러한 유방의 도량과 부하를 향한 신뢰는 항우와 대비되는 면이 있으며, 천하통일에도 이러한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입성하자, 소하는 행정실에 있는 문헌들부터 챙김. 개국공신 소하의 면모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사기」 를 통해 바라본 소하

이때 소하는 함양에 입성하자마자 진나라의 승상 부과 어사부의 율령 도서, 지적도 및 호적부, 기타 문헌들부터 수집했고, 이 정보들은 후일 한 왕조의 법률 제정 및 지방 통치에 유익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전 시대와 달리, 유방이 세운 한나라가 약 400년 간이나 유지된 점을 생각해보면,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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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후 - 유방의 정부인으로 유방의 말년에 막강한 권력을 쥐다. 

역사책에는 못 본 내용인 것 같은데, 가장 신선한 장면이었다.

 

여태후가 소하를 꾸짖는 모습 (포스 작렬)

 

 

여태후는 유방의 정부인이고, 소하는 개국공신 중 한 명이다. 

소하는 한신의 역사가 정당하게 쓰여지는 것을 바랐으나, 여태후가 강력히 반대한다.

필자가 사기, 초한지를 좋아하나, 역사 책에 따로 기록되어있지는 않았던 내용이었다.

역사는 역시 승리한 자의 것인가?  역사 책에 나오지 않았던 장면을 감독이 표현하기 위해 꽤 많은 연구를 했을 듯하다.

한신은 그만큼 그 존재만으로도 무서운 존재였고, 왕을 위협할 만한 존재였다.

 

「사기」 를 통해 바라본 여태후(여치)

여태후의 막강한 권력 횡포는 여기 많이 나오지 않지만, 유명한 일화로,
유방의 첩인 척부인의 손과 다리를 자르고 눈을 도려냈으며, 약을 이용해 귀를 멀게 했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고,
변소에 두어 '인간 돼지'라 부르게 했다. ('사기' 내용 中)

결국, 한신을 죽게 한다.

우미인 - 항우가 사랑했던, 우미인의 죽음.

이후 패왕별희의 소재가 되어.

 

항우를 바라보는 우미인

 

해하 전투에서 유방의 군대가 항우의 진영을 둘러싸고, 항우는 사면초가의 상태가 되었다.

더욱이 유방이 한나라의 노래를 부르게 하여, 초나라는 더욱 사기가 저하되었다.

우미인은 서시, 양귀비, 왕소군과 함께 중국 4대 미녀로 꼽히는 인물이며, 항우의 첩이었다.

 

 

항우 - 누구도 예상 못했던 항우의 패배.

 

「사기」 를 통해 바라본 항우

항우는 용맹무쌍하고, 전략을 가진 군사이자, 무장이었다.그의 용맹무쌍함을 보여주는 전투가 바로 팽성전투이다.

함양을 먼저 입성하여 지켜주었다는 명분으로, 유방에게 파촉땅 한왕의 제왕 자리와 병사를 물려주었더니,

항우가 제나라의 전영을 진압하러 간 사이, 유방이 주변 제후국들을 끌어모아 56만의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의 수도,

팽성을 함략해버렸다. 빈집털이에 성공한 유방의 침략에 빡친 항우는, 결국 3만 대군을 이끌고 팽성에 반란을 

제압하러 가는데, 이 것이 중국 역사에서 유명한 팽성전투 이다. 

무려 3만 대군으로, 56만의 대군을 격파시킨 전투!, 유방의 군대가 전멸하여 어찌나 시신의 수가 너무 많았는지,

수수 강의 물이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

 

 

 

 

해하전투에서 포효하는 항우

 

 

항우의 대명사는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하다.'이다.

귀족 출신이고, 무예도 화려하고, 군사력도 훨씬 막강했었던 항우.

진나라를 깨부술 때, 그 유명한 거록 전투에서 솥뚜껑을 깨고, 단 3일간의 양식만 지니고 죽더라도 돌아갈 마음이 없음을 보여주는 파부침주(破釜沈舟) 로 파격적인 승리를 거머쥔 용맹한 항우. 그는 도대체 왜 패배하였을까? 

 

이는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할 줄 아는 유방과는 달리, 인재를 쓰지 못함이 항우의 큰 패배 요인으로 본다.

 

 

그래서 그런가, 항우는 측근의 전략보다는 너무 자신의 힘을 믿었다. 해하 전투 전 자신을 스스로 평가하기를,

 

'군사를 일으킨 지 8년 동안 70 여 차례 싸우면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모든 싸움에 이겨서 천하를 얻었으나
여기서 곤경에 빠졌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버려서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것은 아니다. 오늘 여기서 세 번 싸워서
모두 이기면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게 아니란 것을 알 것이다.'

 

이는 두 번째 이유로, 항우는 자만심에 빠져서 패하였다.

 

한신 - 천재 전략가였으나, 토사구팽 당한 비운의 남아. 

 

영화속  한신
'왕후장상이 되는데 어찌 혈통이 따로 있겠는가?' 외치는 한신

 

'왕후 장상이 되는데 어찌 혈통이 따로 있겠는가?'

크게 외치는 한신!, 이는 유방이 진 나라를 멸하기 위해 외쳤던 구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이 한신 자신에게 얼마나 위험한 발언이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유방은 이미 세력이 커질 대로 커져버린 한신을 경계했고, 유방이 천하통일을 하고 난 후에는 세력이 커질대로 커져버린 한신에게 모반혐의를 씌워 6년 동안 옥에 가뒀는데도 말이다. 장량과 한신과의 대화 밖에는 여태후가 심어둔 노예 첩자가 이를 듣고 있다.

 

 

장량에게 한신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태후

 

유방은 이미 병약해져 있었다. 여태후는 한신의 세력이 날로 커지고 있으므로, 신속히 처단해야 한다고 유방에게 속삭인다. 한신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태후에게, 유방은 '장량과 소하가 그리한다면 나도 따르리라' 한다.

이렇게, 애초 유방은 한신을 죽일 마음은 없었으나, 여태후는 장량과 소하를 압박하여 한신을 죽이게 한다.

 

 

유방의 대장군 자리에 한신을 직접 천거했던 소하, 죽기전 여태후의 지시로 궁으로 직접 데리고 가다.

 

 

결국 여태후는 한신을 대장군으로 직접 천거했던 소하를 시켜, 한신을 잠시 궁으로 불러들여 포박하여 죽인다. 

 

여태후의 명으로, 한신을 포박하는 장수들

 

 

「사기」 를 통해 바라본 한신

 

한신은 분명 천재 전략가이다.

[회음 후열 전]에는 위나라, 조나라, 제나라 공략이 있고, [고조 본기]에는 해하에서 항우를 대파하는 내용이 있다. 

 

명나라 동빈 왈

"한신의 지략은 정말로 세상 사람의 마음을 활짝 열어준다. 전략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걸이라 불린다."

명나라 당순지 왈

"제강 공명이 유비를 처음 만나 삼국의 형세를 논한 것도 한신의 분석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회음 후 한신이 그저 전략에만 특출한 인물이 아니라고 본다"

명나라 모곤 왈 (사 기초에서 논평하길)

"내가 고대 전략가들을 훑어보니 한신이 최고였다. 나무통으로 위나라를 격파했고, 한나라의 붉은 깃발을 세워 조나라를 격파했고, 모래주머니로 제나라를 격파했다. 이런 전략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듯 기묘해 적과 혈전을 벌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태사공은 문장의 신이다. 이백은 시의 신이다. 굴원은 사부의 신이다. 유령과 완적은 술의 신이다. 그렇다면 한신은 전략의 신이다.! "

 

대장군 한신의 능력으로 여러 나라를 모두 무찔렀는데, 위나라/조나라/제나라에 대해 격파한 전술만 서적에 묘사되어 있고, 나머지 나라와 성들을 격파하였던 신출귀몰한 전략들이 서적으로 남아있지 않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위나라/조나라/제나라 를 격파한 전술만 읽어봐도,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전략이라 가히 흥미롭다!

 

당시의 한신은 혼자서 72 개성 이상의 성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는 유방과 항우의 병력을 합친 것보다 더 많았다!

신출귀몰한 한신의 군사전략을 집필했다면, 위대한 전략서가 되었을 것이다!

 

토사구팽 당했을 것으로 보아, 처세술에는 매우 약했던 한신.

특히 인간관 계술, 정치술에 약했고, 명예욕은 지나쳤다.

 

한신이 '군사적 전략 천재'라는 자신의 본질에 맞는 과업을 조직 속에서 이어갔다면, 유방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역사에 이름도 길이 남겼을 것이다. 한신은 자신이 더 큰 조직의 일원이라는 것을 망각했고, 그런 그를 조직은 저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국의 대역사학자 사마천은 이렇게 말하며 안타까워했다.

"만약 한신이 도를 배워 겸양을 지키며, 자기의 공적을 자랑하거나 재능을 내세우는 일이 없었던들, 한나라 왕조에 대한 그의 공훈은 저 주공과 소공, 태공망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이며 국가의 원훈이어서 뒷 세상에 길이 사당의 제사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괴통, 한신의 성격을 잘 이해하고 길을 제시한 한신의 책사, 은 이렇게 경고하였다. "

용기와 지략이 군주를 진동시키는 자이십니다. 초나라로 돌아가면 초나라 사람이 믿지 못할 것이며, 한나라로 돌아가더라도 한나라 사람이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남에게서 상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그릇이 되셨습니다. 살아남는 길은 자립하여 항우, 유방과 대립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

  하지만, 한신은 그런 용기를 발휘하지 못했다. "필부의 용기와 아녀자의 인자함"이라고 항우를 혹평했지만, 정작 자신은 필부의 용기를 넘어서지 못했고, 독립하지 못하는 자신을 의리라 스스로 변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내 머리를 굴리며 자신의 이름을 더 높이 드러내려 애썼다. 그는 지위나 명예를 추구하는 인간이었지, 과업에 충실한 인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필자는 본 영화의 줄거리를 상세 기술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사기의 내용을 덧붙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했다.

유방/장량/진평/범증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쓰고 싶지만, 블로그 내용이 너무 중구난방 될 것을 염려하여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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