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것을 익히고 습득하면, 그 또한 즐거운 일이 어디있으랴?'
공자 - 논어, 가장 첫번째 문장이다.
필자가 학문을 배우는데 온 힘을 쏟았다면, 큰 뜻을 이룬 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학문을 배우는데에는 그닥 관심이 없었고, 개인적으로 인물을 배우는데 관심이 많았기에 역사서를 탐독하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 없었다. 그런데 역사서를 읽다보니,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대부분의 위인들은 대부분 경제관념에 박식한 상인 출신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상에만 앉아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보다는, 시작은 미천한 상인이나 훗날 한 나라의 백성들을 굶지 않게 했던 상인 정치가들에 대해 우리는 더 배울 점이 많다!
돈을 잘 버는 사람을 왜 상인이라고 했나?
중국 고대의 역사는 하나라(은나라)로 부터 시작된다. 하나라는 상나라에게 멸망당했는데, 상나라 사람들이 가장 잘하는 것이 바로 상업이었다. 그리고 상업으로 하나라를 멸했다.
하나라의 왕은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많은 주변국들을 정복했다. 그리고는 온종일 궁중에서 주색에 빠지며 지냈다. 주변국들로부터 금은보화는 물론 미녀들을 얻었고, 왕궁 안에 커다란 인공호수를 파서 술을 가득 채운다음, 남녀들이 서로 쫓아다니며 밤새 놀게 했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고 알고 있는 '주지육림' (술로 만든 연못과 고기로 만든 숲)이다.
이 때, 상탕이라는 인물이 은밀히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는데, 그는 정치와 군사적인 수단 외에 무역 전쟁의 수법을 사용했다. 궁중 안의 미녀들이 몇 십벌의 옷이 필요했을 테니, 고급 비단의 수요는 계속 증가하여 가격이 계속 상승하였다. 이 점을 노리고 길지도 않은 시간 안에 하 왕조는 식량 부족 사태를 맞았고, 나라의 곳간도 텅텅 비었다. 그러나 상탕의 물자는 여유롭고 풍족해졌으며 부락은 강성해졌고, 하 왕조를 멸했다.
원래 상인은 상족의 사람이나 상조의 백성을 가리켰던 말이다. 이는 한나라 사람을 '한인'이라 일컵고, 당나라 사람을 '당인'이라 일컫는 것과 같다. 그러나 상 왕조가 건립되기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상조가 멸망한 뒤에도 상족 출신의 사람들은 주로 상업을 직업으로 한데다 상업 기술도 높았기에 오늘날 장사로 사고파는 사람의 대명사로 모두 '상인'으로 통칭하게 된 것이다.
전설적인 상인들 (#1 →#2 →#3 →#4 , 시대순으로 열거했음.)
오늘 여기서는 실질적으로 백성들을 먹여살릴 수 있게했던 경제정치를 펼쳤던 위대한 인물들 그리고 상인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여성으로서 당대 CEO로 승승장구했던 과부청, 제나라를 열였던 강태공, 관중과 포숙아, 공자 옆의 상인 자공, 범려이야기 를 다루고자 한다.
#1 나라를 다스린 상인, 강태공
주 문왕은 상 왕조를 뒤엎을 모의를 강태공과 함께 했으며, 모두 태공의 기본 책략을 받들며 따랐다. 이후 주나라가 상 왕조를 뒤엎고, 주 문왕은 강태공에게 제나라로 가서 나라를 다스려 달라고 부탁한다. 그 땅은 주왕조 초기에 외지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으며, 사마천의 '화식열전'은 이렇게 표현 했다. "태공망이 봉해진 곳은 모두 소금기가 있어 농작물이 자라지 못했고 인구도 매우 적었다." 결국 하나부터 열까지 강태공이 창업을 시작해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창업을 했을까?
제나라의 토지는 소금기가 많아서 식량 생산에 적합하지 않았고, 경제는 낙후했고, 인구도 적었다. 농업 생산에 힘을 쏟았더라면, 더욱더 폭망의 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태공은 현실을 직시했고, 바다가 가까워 염분을 품은 땅이 많다는 것에 어업과 제염업의 발달시켜 그것으로 무역을 하게 했다.
게다가 태공은 여자들이 방적을 하도록 격려하여, 제나라의 여성들을 널리 불러 모아 방직업의 발전을 도모했다. 방직업의 발전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부계사회였던 당시에 여자들을 중심세력으로 변화시켰다는 점, 자연 조건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 등의 무역 흑자를 통해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이러하니, 다른 지방에 살고 있던 지역 주민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모두 제나라에 살고 싶어했다.
이렇게 강태공의 업적은 무려 8백년 동안이내 존재했던 제나라를 창건했을 뿐만 아니라, 제나라가 부강할 수 있었던 초석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2 나라 모두를! 중국 천하를! 다스린 상인, 관중. 그리고 그를 알아본 포숙아.(관포지교)
강태공이 세상을 떠나고, 3백년이 지난 뒤, 소상인 출신의 위대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관중이다.
#2-1) 관포지교을 통해 얻는 점은 우정이 아니다. 그렇다면?
관중과 포숙아 그들은 같은 학교를 나오고, 같이 군대를 지낸 이들이었다. 그들은 젊은 시절 모두 정치에 몸담지 않고, 여러해 동안 장사를 하여 둘간의 우정을 다룬 관포지교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관중은 포숙아와 같이 장사를 하던 시절, 동업을 하는 포숙아보다 훨씬 많은 이익을 챙겼다. 전쟁터에 나가서는 적진으로 돌격할 때 가장 뒤에 있었고, 물러날 때에는 가장 앞에 있었다. 이렇게 하찮은 관중을 꿰뚫어본 포숙아의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은 널리 칭송받고 있다.
포숙아가 관중을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을 꿰뚫어보았던 이유는, 바로 그 사람의 본질을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관중의 비열한 것은 그저 표면적일 뿐 홀로 계신 노모를 생각하는 마음 뿐이었지, 재물을 탐하고 싶지도 않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잘 알았었기 때문이었다.
포숙아와 관중이 각 주군의 참모 자격으로 적군으로 서로 대치한 적이 있었는데, 포숙아 측이 승기를 잡았을 당시 포숙아는 반드시 관중을 천거해야한다고 했다. 포숙아 자신을 취하면 제후를 다스릴 수 있겠지만, 관중을 취하면 중국 천하를 다스리실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당신은 당신의 친구를 이렇게 천거할 자신이 있는가? 대역사학자 사마천은 이 점을 꿰뚫고 있었기에 포숙아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관포지교'를 입에 올리는 것은 관중의 재덕을 칭찬하려는 데 있다기보다 오히려 포숙아의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을 칭찬하려는 데 있다." (사기 中 '관안열전'에 기록됨.)
그렇다면 관중이 상국의 위치까지 오르고, 포숙아를 추천했었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럼 포숙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관중이 죽기전, 환공(임금)은 "중부께서 맡았던 임무를 누구에게 맡기면 좋겠소?"하고 묻는다.
그러자 관중은 이렇게 답했다.
"포숙아는 정인군자로서 도덕과 품격이 참으로 고결합니다. 설령 대국을 공짜로 주더라도 바른 이유가 없다면 그는 받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포숙아는 상국을 담당하기에는 결코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쁜 일이나 나쁜 사람을 원수처럼 증오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한 번이라도 저지르면 평생 마음에 담아두고 잊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모이지 않고 사람이 너무 살피면 따르는 무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포숙아는 훌륭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포용력이 크지 않기에 상국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그 자신에게도 이롭지 않습니다."
필자는 관중의 말에서, 사람에게 있어 포용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2-2) 그렇다면, 대체 관중은 어떠한 자인가? 무슨 일을 했길래 자손대대로 칭송받는가?
관중이 있었기에 제나라의 왕 환공은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었고, 모든 제후국들이 제나라의 왕 앞에 무릎꿇어 여러 제후국들이 충신의 뜻을 갖추겠다는 서약을 받게된다. 우리가 아는 공자 또한 관중을 위대한 인물이라 칭하지 않았는가!
관중은 이러한 명언을 남겼다.
"곳간이 가득하면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하면 영욕을 한다."
즉, 돈을 벌고 충분히 먹고 살만하면, 그 때 예절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굶어 죽게 생겼는데 예절 따위가 무엇이 중요한가? 관중은 부국강병과 경제발전이 나라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는 것을 꿰뚫어본 것이다.
그가 정치계에서 활약할 때, 경제발전과 부국강병을 첫 번째 대업으로 삼았다. 특히 농업 발전의 토대 위에 강태공이 시작한 정책을 계승하여 공업과 상업의 발전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사회의 구성원을 사, 농, 공, 상의 네 부분으로 나누고 이들을 각각 한 곳에 거주시켜 집단으로 거주하며 분업을 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엔지니어는 계속 대를 이어 엔지니어 집안이 되고, 농부는 계속 농부 집안이 되는 것인데, 상당히 경직되어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생산 기술과 경영 기교 부분의 축적된 경험이 대대로 계승된다는 점에서 상당히 혁신적이었으며, 교육하는 환경 조성에 상당히 유리하므로 선진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관중 때에 사, 농, 공, 상은 계급적인 차별이 없었으나, 상앙 시절에 이르러 상업을 억제하는 정책을 펼쳐 차별을 보이기 시작했다.
#3. 공자 옆에 붙어 있던 상인 자공
#3-1) 그는 어떤 사람?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는 역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사립대학총장이라고 이를 만한 인물이다. 당시 3천명에 이르는 제자가 한 곳으로 모여들 정도였으나, 사랍이었으므로 당연히 정부의 재정 지원은 없었다. 그럼 학교 경영에 필요한 경비는 누가 벌어다 준 것일까? 여행 중에는 항상 여관에 묵어야 했을 것이고, 밥도 해결했어야 했고, 교육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어떻게 얻을 수 있었단 말인가? 또한 여행 중에 산적이나, 다른 제후국들의 적을 만나 겹겹이 둘러싼 포위망을 어떻게 뚫고 나올 수 있었겠는가? 늘 적들에게 포위된 상황이 자주 발생했을 때 공자는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책을 읽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까지 부르는 등 태산이 무너져도 눈 깜빡하지 않았다하니 필자의 시선으로 보면 답답하기 그지 없다. 반면에 자공은 갖고있던 금은붙이를 두르고 적의 두목을 찾아가 뇌물을 건네고 빠져나오는 등 꾀가 많았고, 언변도 대단했다고 한다. 공자의 옆에는 항상 똑똑한 상인, 자공이 있었던 것이다.
공자의 '논어'는 공자와 제자의 대화를 다룬 내용인데, 거기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자공이다.(37번) 또한 사마천의 '화식열전'를 보면, 자공이 조나라와 노나라 등을 오가며 국제 무역을 크게 했음을 알 수 있고, 공자의 제자 3천명 중 현자가 72명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대부호였다는 기록이 있다. 자공은 이렇듯, 공자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인물이었고, 상인으로서도 상당히 능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자공은 국제무역으로 무엇을 사고팔았을까?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논어'의 자한 편을 미루어 짐작컨대 보석 장사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3-2) 자공이 생각하는 이론
사실 크게 성공한 부자 자공은 공자 수하에 입문 당시 일찍이 자신이 더 훌륭하다고 여기며 우쭐댔다. 게다가 처음에는 공자의 학문도 안중에 두지 않았고, 공자에게 배우는 일을 중시하지 않았다. 배운지 한 해가 지나자 자신이 공자보다 낫다고 생각했고, 두 해가 지나자 공자와 같다고 생각했으나, 세 해가 되자 자신은 공자에게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공은 가난뱅이와 부자라는 두 가지 인생 체험을 모두 겪었기에 가난할 때와 돈이 넉넉할 때에 어떤 생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깊이 생각해낸 결론은 '가난하 때에도 열등감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굽실거리며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고, 또 돈이 넉넉하다고 잘난 체 우쭐거리며 다른 사람을 능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난하면서 굽실거리지 않는 것보다 부유하면서 오만하지 않기가 얼마나 더 어려운가! 공자 또한 이 점을 강조했고, 이러한 까닭은 사람의 내적수양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상인이 학문을 사랑하는 지식이 되었으니, 이것이 상인이 보인 진보라 할 수 있겠다.
#3-3) 자공의 지혜.(언변력과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통찰력) 제후를 유세하여, 전쟁을 막다.
자공이 살던 시대는, 오나라의 월왕과 구천이 있던 춘추전국시대의 마지막 해가 지는 때라고 볼 수 있다. 당시는 전쟁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난 시기였는데, 자공은 각국이 처한 상황을 각국의 이익에 맞게 설명하는 뛰어난 언변력으로, 유세를 하여 전쟁을 막았다. 즉, 자공은 상인으로서 자신의 이익만을 탐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인식과 화려한 언변이 있었기에 지혜를 발휘할 줄 알았던 것이다. 훗날에는 많은 군주들이 자공과 대등한 입장에서 그를 상객으로 모셨다. 결코 그의 돈이나 예사롭지 않은 당당함 때문이 아니었다. 단순히 돈만 있고 고상한 도덕이나 훌륭한 교양도 없고 인격도 온전하지 않다면 존경 받을 수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돈은 아주 중요하나, 결코 만능이 아닐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공정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배움을 통해 훌륭한 인격을 갖춤으로써 보통의 상인과는 견줄 수 없는 당대의 유상(지식이 있는 상인)이었던 것이다.
#4. 대정치가 범려 이야기.
월나라의 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의 왕 부차를 멸하게 하였던 1등 공신의 대정치가이다. 월왕 구천이 와신상담하여 오나라를 멸하고 월나라가 춘추전국시대의 마지막 패자가 되었을 때, 범려는 '월왕은 환난은 함께할 수 있지만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다.'라고 판단하고 가차없이 떠난다. 물러날 때를 알고 홀연히 정치계에서 사라진 후, 대정치가가 아닌 대상인이 되어있었다.
4-1) '계연지책'의 이론을 그대로 따르고, 부자가 되다. 도가사상을 품고, 상업에서도 성공하다.
범려는 제나라 바닷가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어업과 염업을 했을 것이다. 그는 '계연지책'의 가르침에 따라 자수성가하여 빨리 부자가 될 수 있었고, 제나라 상류층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정도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계연지책'은 상업 경영의 비기와 같은 책인데, 핵심은 값이 오를 때는 똥 버리듯이 내다 팔고, 값이 내릴 때는 금은주옥 취하듯이 사들여라는 것이다. 게다가 자금 회전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해서 고가의 폭리를 취하지 않고 십분의 일의 이윤만 추구하는 박리다매의 원칙을 말해주고 있다. 범려는 첫번째 창업에 그치지 않았고, 두 차례, 세 차례, 네 차례나 창업을 했다. 왜 자신을 그리도 고통스럽게 만들었을까? '계연지책'의 상업 경영 사상에 깊은 인식을 가졌다는 것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계연지책의 이론은 도가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도가에서의 '도덕경'은 만족할 줄 알고 그칠 줄 아는 일처리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범려는 젊은 시절 도가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았던 덕에, '계연지책'도 깊이 고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4-2) 범려의 이론과 사상
'사기' 화식열전에서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현명한 인물을 뽑는 것을 잘했을 뿐만 아니라 유리한 시기 파악도 능했다. 그리고 시세에 따라 이익을 좇았으나 완벽을 기하려고 다른 이를 질책하지 않았다'고 일렀다.
범려가 남다르게 뛰어난 점은 그가 '인물 뽑아 쓰기'에 그치지 않고 '질책하지 않기'를 실행했다는 점이다. '질책하지 않기'란 그를 위해 일하는 아랫사람이 한 일에 대해 완전무결을 요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과도하게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사람 대하기를 비교적 너그럽게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시장의 흐름에 대해서는 늘 눈여겨 살피며 조금도 대충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왜? 범려는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이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은 바로 시기이자, 상황이다. 상황이란 변화가 무쌍하여 예측할 수 없어, 조금만 늦어도 사라져 버린다. 그것을 놓치는 순간 사람의 힘만으로는 되돌릴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범려가 아들을 잃은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이 이야기는 '계연지책'에 담긴 범려의 깊은 인식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범려가 지닌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인생의 지혜를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5. 여성 CEO, 과부청. 진시황이 귀빈의 예절로 접견하다.
과부청이 운영한 사업은 주사 채굴업이었다. 주사는 비단이나 삼베 따위의 방직물을 붉은 색깔로 물들일 수 있다. 게다가 주사는 수은을 만들거나 약재에도 쓰였다. 이렇게 쓰임이 많다보니 주사 채굴은 돈을 벌기에 대단히 좋은 업종이었다.
이 일은 과부청의 조상이 시작하여 몇 대나 내려온 가업이었다. 그녀의 재능은 대단했는데, 기업인으로서 명성도 온 세상에 퍼졌다. 당시의 황제 진시황도 그녀를 귀빈의 예절로써 접견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위해 '여회청대'라고 이름 붙인 높은 누각까지 세우고 표창했다.
필자 핵 리뷰 포인트
강태공은 농업을 하기엔 열악한 땅이라는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고, 젊은 시절의 소상인 경험으로 무역경제를 통해 나라를 먹여살렸다. 부국강병은 무역경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다.
포숙아가 관중을 평가하는 대목에서 사람의 본질을 살필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고,
관중이 포숙아를 평가하는 대목에서 사람이 너무 맑으면, 포용할 수가 없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관중에게서, 인문학과 배불리 먹고 사는 것 중 배불리 먹고사는 것이 우선임을 배웠다.
자공에게서는 배움을 통해 훌륭한 인격과 지혜를 갖춤으로써, 학문을 배우고 진보하는 상인의 자세를 배웠다.
범려에게서는 도가사상에 맞는 '인재를 쓰고, 질책하지 않기' 와 '시장의 흐름을 철저히 하는 자세'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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